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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독후감

남과 북 : '빛의 제국'은 과연 어디인가?

by 쟝파스타 2022. 4. 15.

인도네시아 연수 과정의 일환으로 작성했던 '독후감' 파일들을 우연히 다시 찾았다.
하여 해당 독후감들을 내 블로그에 업로드해본다.

읽은 책 : ‘빛의 제국’ _ 김영하

(2010, 문학동네)

http://www.yes24.com/Product/Goods/4135524

 

빛의 제국 - YES24

오늘은 어제와 달랐고, 그 어떤 날과도 달랐다어느 날 갑자기 남파간첩에게 귀환명령이 떨어진다. 돌아가면 죽을 수도 있다. 결혼하여 남한의 보통 남자들처럼 살아온 주인공은 북으로 돌아가

www.yes24.com

 

 

 

   나는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육해공군이 모두 함께 근무하는 '국직' 부대에서 군생활을 보냈다. 나의 업무는 지하 벙커에서 북한, 특히 북한 공군의 레이더에서 송신하는 모스 부호(Morse Code)를 감청하는 것이었다. 때로 북한의 미사일 발사 도발이 있을 때면 비상근무 체제가 발동되어 휴식도 갖지 못하고 긴장하며 근무했던 적도 있었다.

   입대 이전에 나는 북한에 대해 별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김 씨 왕조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북한 주민들을 불쌍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군생활을 하면서 북한에 대한 나의 분노는 점점 커져갔다. 도대체 나와 북한이 전생에 무슨 원수를 졌길래 24시간 동안 나를 잠도 못 자게 하고 힘들게 하는지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군생활이 모두 나쁜 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새벽에 사무실을 지키고 있을 때는 제법 여유가 있었고, 이 시간에 나는 글을 쓰거나 다양한 책을 많이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을 오래간만에 다시 읽으며 다소 특이하다 할 수 있는 나의 군 생활이 갑자기 생각난 것은 '남파 공작원 이야기' 라는 이 소설의 독특한 줄거리와 소재 때문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평양외국어대학교 영어과에 재학 중인 '김기영' 이라는 학생은 어느 날 당으로부터 대남공작원으로 차출되어 4년간 훈련을 받고, 1984년에 남파되어 한국의 대학생으로 신분을 위장해 스파이로 살아가도록 명령을 받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총을 쏘거나 요인을 암살하는 임무가 아닌, 당시 민주화의 열망 속에 커져갔던 학생 운동에 참가하여 대학생들에게 북한의 주체 사상을 주입시키고 나아가 체제 전복을 도모하는 것이 '김기영' 이 하달받은 임무였다.

   본래 뛰어난 학습 능력을 가지고 있던 '김기영' 은 수월하게 남한 사회에 적응한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 인가 당의 지령이 끊겼고, 그는 결국 그만의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김기영' 은 남한 여자와 결혼을 하고 딸까지 얻는다. 그러나 2002년 월드컵 당시 한국 대표팀이 이룩한 4강 신화에 열광까지 하게 될 정도로 남한 사회에 동화된 '김기영' 에게 갑자기 북한으로 복귀하라는 당의 새로운 지령이 내려오면서 소설의 전개는 빨라진다. 북으로의 복귀와 남한에서 새로 얻은 가족과의 행복 그리고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천박한 안락함 사이에서 고민하던 '김기영' 은 결국 후자를 택하고 국가정보원 측에 자수를 하며 소설은 끝이 난다.

 

   언뜻 보면 일반 독자들은 이 소설을 읽고 김영하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처음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내가 느낀 감상은 조금 달랐다. 그것은 바로 이 소설의 소재에 대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라는 납득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북한의 대북 정보를 감청하는 부대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고 종종 '인간 정보'를 담당하는 부대에서 전송되는 '남파 공작원' 관련 문서를 열람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은 등장인물들을 통해 동북아시아 국가 간에 존재하는 힘의 논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인 '김기영' 의 아내 '마리'는 남편 몰래 젊고 똑똑한 남성과 외도를 즐긴다. 그녀는 남자 친구의 제안에 못 이겨 남자 친구의 또 다른 친구까지 초빙하여 2:1 성행위를 행하는데, 작가가 이 장면을 묘사할 때 마리의 모습이 중국과 일본 혹은 러시아와 같은 강대국 사이에 끼어 신음하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오히려 북한과 흡사했던 사회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1980년대 남한 사회가 어떻게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욕망으로 가득한 사회로 변하는지 '기영'을 통해 묘사하는 과정 역시 기억에 남는다.

 

   이 소설이 신기한 점은, 읽을 때 마다 '빛의 제국'이 남한을 뜻하는 것인지, 북한을 뜻하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처음 나는 '빛의 제국'이 당연히 밤에도 환한 빛으로 가득한 대한민국의 모습을 비유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두 번째 읽었을 때는 '장군님의 은총'을 '빛'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북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번 크리스마스이브 때 다시 읽었을 때는 솔직히 빛의 제국이 어디를 뜻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빛의 제국'이 남한이든 북한이든 무슨 상관이 있을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백과 흑을 섞으면 회색이 되듯이 어쩌면 남과 북 모두 모순으로 가득한 '회색 제국'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 2012년 12월 28일 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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