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연수 과정의 일환으로 작성했던 '독후감' 파일들을 우연히 다시 찾았다.
하여 해당 독후감들을 내 블로그에 업로드해본다.
읽은 책 : ‘82년생 김지영’ _ 조남주
(2016, 민음사)
나는 야구를 좋아해서 'MLB 파크'라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자주 접속한다. 20대 초반에서 50대 중반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남성들이 주로 접속하는 사이트로, 아무래도 남성의 입장이 주가 되는 게시물이 많이 올라오는 편이다.
작년 10월이었던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헤드헌터들에게 이력서와 경력기술서만 돌리고 호위 호식하며 살고 있던 때다.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책이 발간되었다는데 이 책으로 인해 'MLB 파크' 자유게시판이 잠시 난리가 났었다. 여성의 입장을 담담히 그려낸 수작이라는 평도 있었고, 결국 여성들의 징징대는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써 놓은 불쏘시개와 다름없다는 의견까지 다양했다. 도대체 무슨 책이길래 이런 난리가 났는지 궁금하기도 하여 '양천 시립도서관'에 들러 봤지만, 인기가 좋았는지 항상 대출 중이었다. 그렇다고 내 돈을 주고 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무래도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을 가장한 편협적인 소설' 이라는 한 인터넷 논객의 평이 마음속에 걸렸기에. 그렇게, '82년생 김지영' 이라는 소설은 잠시 내 관심 밖으로 멀어졌다.
그러던 와중에 올해 12월 초, 같은 반 연수생 형님이 책을 가지고 있는 것을 우연히 확인하였다. 한 번쯤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기에 빌려줄 수 있는지 형님에게 물어보았고,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이렇게 작년 10월 나를 잠시 궁금하게 했던 책을 읽게 된 것이다.
소설 자체는 술술 읽혔다. 제목을 통해 쉽게 연상할 수 있듯, '김지영'이라는 가상의 여성을 통해 그녀가 한국에서 오직 '여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떤 차별을 받았고, 또 어떤 상황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본인의 꿈을 포기해야 하는지를 담담히 그려냈다. 그녀가 대학에 입학하면서 바보스러울 정도로 본인보다는 가족에 헌신적이었던 자기의 어머니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 것이라는 결심과는 달리, 또 다른 '김지영'을 낳고 '어머니'가 되는 과정까지도.
특히 여성의 '월경'과 '출산'을 묘사한 부분에서 여자 형제가 없는 나로서는 읽고 난 뒤 꽤 충격을 받았다. 여성이 '월경'을 할 때 이렇게 힘든 지를 미리 알았다면, 나는 '월경'으로 힘들어하는 전 여자 친구들에게 '좀 더 잘해 줄 걸'이라는 조그마한 죄책감도 들었고 말이다.
이 책을 읽고 남자인 나 역시도 '김지영' 씨에게 공감을 하게 한 이유는, 저자가 '김지영' 씨에게 일어난 차별과 불행이 비단 '한국 남자' 들의 잘못만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지영' 씨와 저자인 '조남주' 씨 역시 '한국 남자' 또한 열심히, 나름대로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 하고 있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설 말미에 가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여자들은 결국 남성 우월주의 기반의 한국 사회에 피해자였으며, 이 한국 사회를 주도적으로 건설한 자가 누구인지 독자에게 조심스레 질문하며 끝을 낸다.
그렇다면, 나 역시도 이렇게 질문해보고 싶다. '82년생 김지영' 씨가 출산과 육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본인의 꿈을 버리고 퇴사를 해야 했다면, '82년생 김지영' 씨가 밤길에 본인을 따라온 같은 학원 수강생 남학생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면, '82년생 김지영' 씨가 오직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초등학교에서 남학생들보다 뒷자리 수의 출석 번호를 받아야 했다면...
그렇다면... 지영 씨가 취업준비생 일 때 옆에서 끊임없이 도와주고, 먼저 취업한 지영 씨를 항상 응원하며, 본인도 취업 준비생이라 힘들었을 때 옆에 함께 못 있어준 이름도 나오지 않았던 지영 씨의 두 번째 남자 친구의 희생은 그녀에겐 무엇이었을까?
요즘 인터넷 상에는 '페미니스트' 혹은 '한남충', '일베', '메갈', '워마드'라는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의 신조어들과 인터넷 커뮤니티들로 야단 법석이다. 인터넷, 특히 SNS의 발달로 서로 생각하는 바가 비슷하고 지향점이 같다면 쉽게 의견을 모아 집단행동을 행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때로 이런 환경이 우리나라 여성과 남성에게 미칠 부정적인 영향이 두렵다.
'남녀평등'이라는 고귀한 기치를 내세우며 남성에게 좀 더 이롭게, 혹은 여성에게 좀 더 이롭게 사회 구조를 자기들 마음대로 재단하고 있는 사회가 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특히 '남녀가 함께 근무하는 사무실에서 급수기 물통은 오직 남자가 갈아 끼우는 것이 옳은 일인가?'라는 주제로 'MLB 파크'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걸 봤을 때 이런 나의 걱정은 더해졌다.
사실, 물통을 누가 갈아 끼워 든 무슨 상관인가. 목마른 사람이 갈아 끼우는 게 옳은 것 아닌가. 여자들만 있는 회사에선 여자들 2명 혹은 3명이 어떻게든 물통을 새로 갈아 끼운다. 목이 마르니까.
남자가 여자보다 많은 사무실에선 남자가 주로 하면 또 어떤가.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남성이 여성보다 근육량이 많고 육체적인 능력이 뛰어난 것은 사실인 것 아닌가. 이것 역시 남녀차별적 발언이라면, 남자와 여자가 함께 동시에 '하나, 둘, 셋' 하고 함께 갈아 끼우든지.
결과적으로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내가 느낀 감정은 이러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벌어진 갑론을박을 접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나라 여성들도 긴 시간 동안 힘든 삶을 살았지만, 우리의 아버지들과 형들, 그리고 내 친구들 역시 많은 것을 포기했고, 그리고 나름대로 안간힘을 쓰며 생존을 위해 살아갔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단지 현재 대한민국의 흐름이 '여성의 인권 신장'과 '여성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관심을 갖는 정치인들이 많아졌다는 것이 예전과 달라졌을 뿐이다. 여성 유권자들의 표를, 과거와는 달리 절대 무시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이쯤 되면 '82년생 김지영' 씨도, 그의 언니도, 그의 여자 사람 친구들도 '투표'를 열심히 해서 그들이 원하는 '여성을 위한 대한민국'을 만들면 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남성 우월주의자인 것은 절대 아니다. 나는 오히려 여성과 남성의 기본적인 성 역할을 충실히 하고, 나아가 사람 대 사람으로서 서로의 평등함을 지켜야 함을 강조하는 사람이다.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라기보다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기본적인 성별에서 오는 차이를 인정하고, 이에 대한 배려를 해 주는 것이 당연시되는 사회가 왔으면 하는 것이 나의 자그마한 소망이다. 여성이 월경으로 인해 힘들어하면, 잠시나마 노동의 의무에서 벗어나 쉴 시간을 주고, 아기를 낳으면 산후 조리를 위해 편안히 쉴 수 있는 국가적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는 사회. 여성 또한 본인이 여성이라 '이런 힘든 일은 남자가 해야 한다' 라기 보다는, '내가 이 물건을 들기에는 조금 무거운 것 같으니, 남성인 당신이 나와 함께 이 물건을 들어주면 안 될까요'라고 부탁하는 사회. 남성 역시도 여성의 이와 같은 고충을 알고 배려해주는 사회.
어쩌면 이런 당연한 사회를 꿈꾸는 것이, 현재의 한국사회에선 너무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운 생각조차 든다.
후기
지난주 토요일, 집에서 쉬며 이 책을 읽고 있는데 어머니가 이 책을 꼭 보고 싶으시다며, 먼저 읽어보면 안 되겠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빌린 책이긴 하지만, 아직 독후감을 제출하기까지는 시간이 남아있으니 어머니 먼저 읽어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책을 드렸다.
오늘 집을 나서며 문득 어머니의 감상평이 궁금해서 여쭤보았다.
다음은 어머니의 짧은 감상평
"다들 그렇게 살았어. 엄마 땐... 그런데, 앞으로 지영 씨와 같은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아이가 내 며느리나 손녀 대에서는 안 나왔으면 해. 쉽진 않겠지만... 그러려면 나도 그렇고, 쟝파스타 너도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단다. 그리고 그러려면 일단 여자 친구부터 사귀도록 하렴. 이해할 대상이 필요하잖니?"
뭔가 더 힘든 미션을 새로이 받은 느낌이다.
좀 뜬금없긴 하지만,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의 김지영 씨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위의 독후감에선 나름 예민하게 글을 썼긴 했지만, 나의 김지영 씨에겐 한없이 관대하고 따뜻한 남자 친구 혹은 남편이 되고 싶다.
- 2017년 12월 17일 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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