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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상을 통한 '새로운 혁명'의 시작
책 & 독후감

‘침묵’의 기다림 끝에 온 부름

by 쟝파스타 2022. 4. 13.

인도네시아 연수 과정의 일환으로 작성했던 '독후감' 파일들을 우연히 다시 찾았다.

하여 해당 독후감들을 내 블로그에 업로드해본다. 

 

읽은 책 : ‘침묵’ _ 엔도 슈사쿠

(2009, 성 바오로딸 출판사)

https://www.pauline.or.kr/bookview?gcode=bo0022087 

 

침묵(다시 읽고 싶은 명작2) | 도서 | 가톨릭 인터넷서점 바오로딸

성바오로딸수도회 운영, 가톨릭 서적 및 음반, 비디오, 성물판매, 성경묵상 제공

www.pauline.or.kr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천주교 신자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종교에 대한 선택권은 없었다. 부모님이 천주교 신자셨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태어나자마자 유아세례를 받았으니까. 사춘기 때에는 내가 자의적으로 종교를 선택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잠시 불만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믿는 천주교라는 종교가 병자들과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정치적, 사회적 올바름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종교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는 오히려 천주교 신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물론, 천주교 자체 내에서도 문제가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서설(序說)이 길었다. 어쨌든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연수 시작 후 성당에 잘 나가고 있지 못하다는 자기 반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독후감을 위한 서적으로 두 포르투갈 신부님의 일본 선교 활동을 그린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골랐다.

   잠시 우리 부모님 이야기를 해보겠다. 서슬퍼런 유신 체제와 신군부 시절에 대학에서 한 번쯤 데모 참가 등으로 민주화를 외쳤던 어른들이 그렇듯 나의 아버지 또한 젊은 시절 지독한 무신론자셨다고 한다. 그런 분이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성당’에서의 신앙생활이 인생에 있어 정말 중요하다고 믿으며 자라오신 어머니를 만나 결혼을 하신 것이다. 여자를 이기는 남자는 없다고 했던가. 결국 어머니의 끊임없는 기도와 설득 끝에 아버지 역시 세례를 받고 지금은 열심히 어머니와 함께 성당에서 봉사와 신앙생활을 하고 계신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작년 겨울 경 이런 배경을 가지고 계신 아버지께서 나에게 적극 추천하셨던 책이다. 그러나 당시 나는 아버지의 추천을 잠시 미뤄두고 있었다. 쉽게 생각했던 재취업에 연거푸 실패하고 빨리 끝날 줄 알았던 백수 생활이 바야흐로 해를 넘기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나는 한가로이 책을 읽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때의 나는 매우 초조했고, 뭔가 빨리 자리를 다시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나는 이러한 아버지의 추천을 결코 피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이 책을 올해 3월 경,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로 극장에서 먼저 접했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자마자 근처 서점으로 바로 뛰어가서 구입, 하루 만에 다 읽어버렸다.

 

   책의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시마바라의 난이 진압된 이후, 포르투갈 예수회의 사제이며 저명한 신학자인 크리스토발 페레이라 신부가 일본에서 혹독한 박해에 굴복하여 배교했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해진다. 페레이라 신부의 제자 세바스티안 로드리고 신부와 프란시스 카르베 신부는 일본에 잠입하기 위해 마카오에 들르고, 안내를 맡은 일본인 키치지로와 만나게 된다. 그들은 키치지로의 안내를 받아 일본에 잠입하게 된다. 로드리고 신부는 카쿠레키리시탄들에게 환영받았으나, 곧 나가사키 봉행소한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로드리고 신부는 하느님의 기적과 승리를 기원하지만, 하느님은 "침묵"할 뿐이었다.

   도망치던 로드리고 신부는 키치지로의 배신으로 밀고되어 체포된다. 이 과정에서 로드리고 신부는 수많은 신자들의 죽음과 박해, 그리고 막부에 체포당해 몸이 묶인 채로 바다에 던져져 순교하는 신자들을 보고 무심코 그들에게 달려가서 익사하는 카르베 신부의 모습까지 보게 된다. 게다가 그들의 죽음에서는 전혀 영웅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고, 허무하게 죽은 뒤에도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으며 하느님에 대해 점점 믿음을 잃어가게 된다.

   로드리고 신부의 혼란은 자신의 스승이자 선교 선배인 페리이라 신부를 직접 만나 그가 순교하지 않고 배교했다는 소문을 두 눈으로 확인하며 극에 달한다. 그리고 끝내 로드리고는 자신이 배교를 하지 않으면 고문당하는 신자들을 용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어 고뇌하게 된다. 결국 로드리고는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진 동판을 밟아 배교하는 이른바 ‘후미에’를 강요받게 된다. 그리고 동판에 발을 가져다 대자 통증과 함께 그림으로 그려진 예수가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 예수는 로드리고 신부에게 "밟아라. 아픔을 알기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나는 그 발의 아픔을 알고 있다."라고 말한다. 로드리고 신부는 하느님이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함께 고통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진심으로 하느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며, 자신을 배신한 키치지로 마저 용서하게 된다. 

 

'후미에'를 위해 사용된 동판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는 로드리고 신부의 심정에 깊은 공감을 했다. 나 역시도 종종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곤 하는데, 이 때 주님께서 이러한 기도에 대해 응답해주지 않고 계신 것은 아닌지 의문이 생길 때가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는 주님과 인간 간의 소통을 ‘기도’로서 진행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통이란 결국 ‘응답’을 받는 것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본다면 나에게 문제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했듯이 내가 주님에게 기도를 열심히 해도 이에 대한 답변을 얻지 못한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뒤집어서 생각해보자. 이러한 의문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기독교인으로서 불경한 행위는 아닐까? 그 신앙심 깊은 로드리고 신부도 오래전에 나와 같은 의문을 가졌음이 작품에서 확인되고 또한 2000년이 넘는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이러한 의문은 많은 성직자들과 종교철학자들로부터 제기되었음에 분명하다.

   예수님은 아마도 미래의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고민했을 것이라는 선견지명을 가지고 계셨던 듯 하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부활 후 자신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도마 사제에게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행복하다!’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20장 19절 ~ 31절)

   이러한 문제로 머리가 복잡한 가운데, 군산에서의 현장 실습이 끝났다.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으며, 또 많은 것들을 배웠다. 따지고 보면, 내가 모르는 사이에 주님 혹은 예수님은 나에게 모 회사의 공장장님 혹은 제2공장의 사람들, 또는 연수 동기들이나 팀장님의 모습으로 오시진 않았을까.

   굳이 주님의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들어야만 주님과의 ‘대화’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생각일지도 모른다. 어찌보면 주님은 항상 나에게 여러 형태로 이야기를 걸어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단지 내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어찌되었든 간에 백수 생활에 비해 나는 더 규칙적인 삶을 살고 있으며, 많은 친구들을 만났고 무엇보다 인생의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 바랬던 ‘길’과 ‘방향’을 찾아주신 것만으로도 주님은 나의 질문과 물음에 이미 훌륭한 해답을 전해주신 것은 아닐까.

   어쨌든, 나는 이러한 형태로나마 주님으로부터 ‘부르심’과 ‘응답’을 받았다. 그리고 설사 그 부름이 주님을 통한 것이 아니어도 내가 그리 믿으면 된다. 결국 공은 나에게 넘어왔다. 이제 나의 몫이다. 내가, 잘 하면 된다. 착실하고, 성실하게. 룰을 벗어나지 않고.

 

   어쨌든,

 

   배교 후 남은 여생을 성직자가 아닌, 먼 이국땅에서 이방인으로 살다가 결국 일본식 장례로 세상을 떠난 로드리고 신부. 끝없이 주님께 길을 물으며 고뇌했던 그는, 사후 그토록 그가 그리던 주님을 만났을까.

 

 

- 2017년 10월 1일 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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