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공상탐험가가 된 이후 잠은 잘 자는 편이다. 특히 조깅을 시작하고 난 뒤 부터는 누우면 바로 잠들었다가 아침에 바로 일어난다. 심각했던 불면증이 치료된건 실로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어제 저녁, 운동을 마치고 어머니가 외출하셔서 아버지와 단 둘이 식사를 했다. 나이가 드셔서 현재는 많이 온화해지셨지만 나는 여전히 아버지가 어렵다. 특히 나와 단 둘이 있을 때 아버지는 나에게 이런저런 의미심장한 질문(Ex. 그래, 그 공상탐험이라는 거, 잘 되고 있느냐. 비전은 있느냐. 등등...)이나 어머니께는 하지 못할 본인의 심정 토로 등을 하실 때가 종종 있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아버지와 아들로 분한 신구 선생님과 배우 한석규씨
(출처 :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33589)
그래서 나름 긴장하며 밥을 먹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밥상을 물리고 내가 설거지를 끝내자 아버지께서 한숨을 쉬며 말씀하셨다.
"어젯밤, 너의 엄마가 심한 욕으로 잠꼬대를 했다.."
세상에... 내 기억으로 어머니가 욕을 하신 적은 단 한번도 없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나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아버지께 다시 여쭈었다.
"...잠꼬대를 어떻게 하셨는데요...?"
아버지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씀하셨다.
"먼저 '야!' 하고 큰 소리를 치더라고... 그래서 깼지... 그리고 씩씩거리면서 '이 새끼! 내가 도륙을 내고 싶은데 진짜 꾹꾹 참고 있다. 다시 우리 아들 건드리면 그 땐 머리부터 발 끝까지 잘근잘근 씹어먹을 줄 알아!'"
"이 새끼요...?"
"누구겠냐..."
"아..."
애써 잊고 있었던 새디스트 P 수석부장이 다시 떠올랐다.
영화 반칙왕에서 대호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지점장. 뭐, 차라리 저렇게 헤드락을 걸었으면 별 말 안 했겠지 싶다.
(출처 : https://brunch.co.kr/@4indie/109 반칙왕 리뷰)
전 직장에서 나의 상사였던, 그리고 내게 큰 상처를 줬던 사람.
(P에 대해서는 향후 자세히 논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직장 상사에게 받는 스트레스는 비단 본인의 문제만은 아닌 듯 하다. 그걸 지켜보는 가족, 이성친구, 부인, 남편, 자녀들에게도 충분히 괴로운 일이 될 수 있음을 어머니의 잠꼬대를 통해 알게 되었다. 하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직장 상사가 되었든 누가 되었든지간에 (경우에 따라 이유없이)혼나고 모욕당하고 그로 인해 스트레스가 쌓여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그 누구가 화나지 않겠는가.
글쎄... 공상탐험가가 되어 직장생활에서 한 발 물러나 제3자로서 그 세계를 바라보게 된 지금, 대한민국의 직장인들은 심한 감정적 자극에 노출되어 있다.
굳이 짜증내지 않아도 되는 사안을 상대방이 무슨 핵폭탄 단추라도 잘못 누른 것 마냥 화를 내며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납기는 다가오는데 요청한 자료가 늦게 도착하거나 아예 오지 않아서 일을 진행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요청한 자료를 송부해줘야하는데 당장 내 일이 급해서 업무시간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면 긴장하는 사람 등...
휴... 말 해 뭐하냐.
그렇게 우리는 차곡차곡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트레스를 쌓아가며 살아가고, 이는 우리들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전달되는 것이다. 우리 어머니의 잠꼬대처럼.
사실, 이제 나는 더 이상 P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도 관리자로서 적지 않은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을 테니. 올해 초에 좌천 되었다는 소식을 듣긴 했는데 뭐 더 이상 내 알 바 아니니 관심 없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인 것을. 공상탐험이 끝나면 다시 직장생활로 돌아가야 할 테지만... 여전히 나는 스트레스가 가득한 그 공간 속으로 돌아가기가, 두렵다. 솔직히.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머니는 본인의 잠꼬대 사실을 모르고 계신 듯 하다. 나와 아버지는 어머니의 잠꼬대를 덮어두기로 했다. 민망해하실지도 모를 어머니에 대한, 그리고 어머니를 사랑하는 두 남자의 배려라면 배려일까.
그나저나...
지난 밤은 잘 주무셨나요...?
2016년, 나의 생일날... 사랑하는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사랑해요 어머니.
2017년 4월 12일(수), 양천구 목동 모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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